투파식 명리

투파이야기(14)

백산. 2023. 2. 16. 14:00

투파이야기(14)

 

 

투파이야기는 과거에 웹 서핑 중에 퍼온 글이었는데, 연재 式으로 올립니다.

本文 중에 誤,脫字는 訂正하고 本文과 관련 없는 글은 옮긴이의 自意로 삭제하였습니다.

** 透派에 관한 글 내용은 옮긴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 아래 -


정통 透派와 透派를 근간으로 하는 이론이 뒤섞여 있으니, 이 점을 참고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글은 1998년 2월에 제가 하역회 명리 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透派 四柱學 이론 가운데 일부 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透派이야기가 나왔기에 소개하는 의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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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론
 
命理에 있어 大運이라는 시간성을 論하기 전에 四柱體에 기국을 가름해야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매우 훌륭한 부분이지만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大運이 '體'로도 쓴 다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大運까지 겸해서 體로 응용하는 사주는 대체로 中格사주나 약간 더 아래에서 노는 사주들이다. 이런 경우들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발복이 가능한 사주이다.

下格사주에서 大運을 '體'로 쓴다는 의미를 부여 하기는 어려운 감이 있다. 즉 너무 깨져서 發福이 不可한 사주인 것이다.

 

실상에서 우리가 주로 만나는 사주들은 中格이하의 사주들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그럼 대운의 해석의 범위는 어떻게 한정해야 하는가?

 

 

1. 조후론(調候論)이 있다.

예를 들어 金水食傷格은 喜 官星.

사주체에 없으면 體로도 응용하는 大運까지 겸하여 四柱體의 格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2. 통관용신이다.
이것은 억부용이 아니다. 체의 개념에서의 용이다.
사주체에서 기류가 막혀있는 사주를 수기유통 시키는 것이다.

 

 

3. 사주체가 조후를 갖추고 종격을 이루었을 때, 그 종격의 대운을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조후를 갖추지 못한 종격은 조후를 완성시키는 대운을 기다려야한다 이런 것들이 대운을 겸하여 응용하는 체의 용이다.

 

 

4. 오행을 두루 갖추면 억부용(抑扶用)에 합당한 대운을 기다리면 된다.


순서에 우선 순위는 없다. 사주의 형상에 따라 거기에 맞는 取用法을 따르면 된다.

또 하나 대운에서 바라봐야 하는 항목이 <刑沖會合과 虛字>

刑沖會合이라는 말은 善惡이 없고 사주의 형상에 의해 善惡이 규정된다.

虛字는 체의 개념으로 쓰기는 어렵다.

그러나 쓰임의 빈도가 높다. 이것들은 내가 대운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많은 부분이 窮通의 논리와 유사점이 있다. 인정한다.

窮通의 논리는 체의 개념에서 활용빈도가 높다.

세운에서는 철저한 억부용이며 형충회합으로 인한 변화를 추단한다.

세운에서는 사주체에 있는 허자와 형충이 일어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허자가 사주체에서 없는 오행일 경우 실감하는 빈도가 높다.

 

 

이것이 운을 바라보는 나의 기본체계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변화가 무쌍하여 많은 노역의 힘을 쓰게 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육친의 유무는 체의 개념에서 해결한다.

여기서는 오행 생극제화 개념과 형충회합의 개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억부용으로 봐도 무방하나 이 부분은 희용신이라고 해서 다 육친의 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운명을 감정한다는 것은 이것을 본다는 것인데. 나는 원한다. 한치의 어그러짐이 없이 이것을 규정 지울 수 있도록.

나는 말한다. 공부한 자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나 완벽하게 도달한 자를 보지 못했다. 단지 어느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나는 귀신같이 맞춘다는 말을 달리 쓴다. "너 올해 간통했지"가 아니라 위에서 말한 내용을 통달한 자를 나는 마음으로 진정한 고수임을 인정한다

 

그 사람이 나와 원수지간이라도 나는 인정한다.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할 수 없이 발목을 잡는 문제들은 널려있다

 

 

그것은 명학적 해석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나와 어떠한 교류 한번 없고 만나 본 일 없는데도 내 뇌관에 들어와 내가, 나를 괴롭히는 정신적 고통은 참으로 비빌 언덕이 없다.

그리고 命理가 절대적 占學에 있어 최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지 대중적 지명도가 높을 뿐이다.

 

 

석달 전에 일이다.

자미두수는 궁과 성계와 사화로 명을 추단하는 독특한 양식의 운명학이다 명리를 공부한 사람이 다가 가기가 쉬운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공부하는 과정에서 초발심에서는 좋으나 과정에서는 명리공부가 독이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명리적 해석으로만 다가가려는 마음이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이 부분에서 자미두수와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한 부분들을 버려야 진짜 자미두수를 공부하는 단계에 들어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경우가 그러했기에. 나는 자미두수를 공부하므로 자미두수와 관련된 사람과 책과 인터넷이 내 환경에 포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들은 나의 생활이었는데. 어느 날 이탈된 곳에서 자미두수를 보았다.

 

 

어느 날 일반인이 나에게 사주를 물어왔다.

나는 성평합참으로 명을 감정하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자미두수는 빼고 사주만 보아 달라는 것이다.

갑자기 이상한 기류가 나에게 다가왔다. 즉 그 사람은 자미두수를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명리를 공부한 사람도 비웃는 사람이 많은데. 일반인이야 오죽 하겠는가?

내가 그때 낙담한 것은 그 사람이 자미두수를 무슨 거적 보듯이 하며 사주만을 보아 달라는 그의 말투의 근원적 원인이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사주 명리가 들이다. 사주명리를 높이기 위해 자미두수를 재물로 삼은 것이다.

자미두수 뿐이겠는가? 여타 점학 모두가 딛고 일어서는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사주를 보면서 그 사람이 실감 할 수 있는 말을 먼저하며 신뢰를 얻은 뒤에 나는 복수를 했다.

보통 안 좋은 부분은 돌려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나 오히려 직설적으로 강도 높게 이야기하며 그를 서운하게 했다. 지금은 그 사람에게 미안 하지만 그 때는 하나도 안 미안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분개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자미두수의 대중적 위치가 여기에 서 있는가?

이로써 내가 자미두수를 위하여 힘써 움직여야 하는 길이 설정되어 버렸다 단지 그 길이 가시밭 길 이라는 전제가 나를 어둡게 했다 물론 사주명리도 발전시킬 것이다.

 

 

자미두수는 선천명반의 명궁 삼방사정과 복덕궁. 부처궁까지 겸해서 즉 육궁을 같이 봐야한다 명궁의 성계의 특질을 보고 삼방사정의 성과 성계로 명궁의 특질을 얼마나 귀하게 하는가 아니면 파괴시키는 가를 보아 귀국을 조율한다.

 

 

즉 명궁에 성이 재에 관련된 성이면 육길성과 화록과 녹존 천마의 동궁과 회조로써 조율하는 것이다.

사업가가 자기 자본으로 일을 무리 없이 해 나가는 형상과 같은 것이다.

명궁이 재에 관련된 성계인데 육길성이 아닌 육살성과 화록과 녹존 천마가 동궁 하거나 회조가 없다면 파격이라 해도 무방하다.

 

 

마치 본질이 재를 구하는데 빚쟁이들과 동거하는 형상이니 그 많큼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몸을 의미하는 신궁을 같이 봐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복잡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왜냐면 명궁 삼방사정과 복덕궁. 부처궁. 이 육궁 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아나로그 개념이 아닌 디지털 개념이 형성된다.

성과 성계가 많아 쉽지가 않지만 전서에 보면 많은 격국들이 있다.

 

 

격국들을 달변하여 몸에 베개하고 검증하여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전서에 나오는 격국들로 조율하는 방법은 반드시 해야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은 자료로써 검증하고 실전을 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대운과 년운의 성패를 추단하는 것은 사화에 있다.

물론 궁과 성과 성계의 형상이 기본이 되며 그 기본을 움직이는 게 사화다 그리고 잡성의 사용빈도 이쯤 되면 어지러울 것이다.

 

 

이 고비가 마치 마지막 고비처럼 느껴져 욕심내어 넘어 보고 싶을 것이다. 결국 손에 쥐어진 건 쓰라린 패배감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쓰러진다(웃어야 되나)

 

한 가지 힌트를 준다면 명리든 자미든 그 대한의 연령대에 실감하는 육친이나 궁을 먼저 터치해야한다. 물론 이런 부분은 학문적인 것과는 거리감이 있다.

 

 

책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책과 싸워 그 책을 버려야한다.

그대여 제발 이겨라. 아니면 책을 찢어 버려라.

 

 

나는 사방이 어두워진 듯 가슴이 답답한 암이 생긴 것처럼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찢어 버리고 던져 버린 책이 한 두 권이 아니다.

 

 

그대여 포기하지는 말아라. 나는 안다. 그대의 포기는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그대는 다시 돌아온다. 반드시 온다. 포기한 자신을 책망하며, 그런 연후에 성숙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는 노련한 웃음을 스스로에게 보일 것이다. 고로 자신의 칼을 보게 될 것이다.

 

 

부엌대기 칼 인줄 알고 한때 막 휘둘렀던 자신의 칼이 칼집에서 나오기 꺼려하는 명검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진정한 고수와 만나면 눈빛만으로도 대화 할 것이다 일월이 언제 뜨고 지는 지도 모른 체 서로를 흠모 할 것이다. 그러하니 지금의 고통을 당연히 감당하라.

 


- 박종식 -

 

 

 

투파이야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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