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암고택(勤庵古宅)
전남 민속자료 제46호.
(2010. 8. 27)
*소재지: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504.
안항(顔巷) 위덕후(1556~1612)는 1578년 인근 당동마을에서 방촌리로 최초 입촌하였다.
병조참판 만회재 위정철(1583~1657)이 1600년 초에 입촌하면서 장흥위씨 씨족마을이 융성되기 시작하였다.
위덕후의 장자 성균진사 청금 위정훈(1578~1662)은 1644년 만포진첨절제사로 퇴직하고 귀향한 종제 만회재 위정철의 주선으로 아우 웅천현감 위정렬(1580~1656) 등 3분이 국풍(지관) 이의신(해남 출신)을 대동하고 천관산에 올라 자신의 집터와 아우의 집터(지금의 존재고택)를 잡았다. 그 후 1649년(己丑) 청금 위정훈은 집을 신축하면서 방촌마을 남산에 위치했었던 장춘대(長春臺: 풍류회합소) 정자를 해체하여 옮겨지었다.
현재의 근암고택은 후손들의 중수를 거쳐 이어져와 고택은 역사 공간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안채는 1910년경 근암 위계상(1879~1948) 중수를 하였다. 방촌마을에 소재한 현존 고택 안채 가옥들 중에 가장 오래된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사당은 관리되지 않아 1998년경 철거되어 아쉬움이 크다. 방촌마을의 독특한 경관 속에 자리 잡은 근암고택은 조선 후기 혹은 근대 초기의 방촌마을의 주택 유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반가 건물로서의 위상도 있다. 청금공 12대손이자 근암공 증손자인 위성갑 종친의 소유다.
※청금공(廷勳): 1578~1662, 안항공(덕후)과 배(配) 청주金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광해(光海) 1612년(壬子) 진사에 입격했으나 조정의 혼란(昏亂)을 개탄하며 출사(出仕)를 단념했다. 그는 1624년 갑자란(甲子亂) 때 의사(義士)와 군량미(軍糧米)를 모집해 도왔으며, 1627년 정묘란(丁卯亂) 때도 호소사 김장생(號召使, 金長生)의 격문(檄文)에 응해 공(公)께서는 중제(仲弟) 웅천현감공(정열, 1580~1656), 계제(季弟) 반계공(정명, 1589~1640)과 종형(從兄) 정망공(1558~1591), 종형(從兄) 국천공(정헌, 1570~1643) 등과 의병·의곡을 모집하고 전쟁터에 나가 도적들을 물리치고 귀향한바 있다. 호란(胡亂)으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이때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의병 모집 격문(檄文)을 접하고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올라가다 5일 만에 왕이 항복(降伏)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다.
公은 청금(聽禽)이라 자호(自號)하고 종제(從弟) 병조참판공(정철)과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에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하나 취임하지 않았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농안리 화운동이다. 죽천사(竹川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웹사이트 -
*죽천사는 전남 장흥군 관산읍 죽교리 418 (관산로 18-84)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길 옆에 근암고택을 가르키는 안내판이 서있다.
근암고택 철대문.
문패는 위성환(魏星煥)으로 되어있다.
*이번에는 때마침 할머니께서 집에 계셔서 집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근암고택 전경.
고택 좌측편에 보일러실을 설치해 두었다.
근암고택.
장흥 근암고택 안내판.
근암고택 액자.
안항유장 액자.
청와루고지 액자.
고택 뒤편 사당 터에서 바라본 근암고택.
과거에는 이곳에 사당을 모시었던 터라고 한다.
장독대.
절구통과 맷돌 등 석제물.
*2023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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